한국인이 즐기는 외국 맥주들

“술과 분위기를 함께 마신다” 수입맥주 시장 급성장
90년대 초 해외여행 자유화 이후 젊은층 중심 확산

‘와바’ ‘USA 75’ 등 수입전문 맥주바 잇따라 개업
각국서 200여가지 수입… 대형 할인매장 가면 누구나 구입
 
1990년대 초 서울의 대학가 먹거리 골목에서 한 맥주가 화제로 떠올랐다. 짙은 브라운색 일색이던 맥주병 대신 투병한 병에 담긴 ‘밀러’라는 미국산 맥주였다. 누가 “여기 병따개 갖다 달라”고 하면 옆에 있던 친구는 “야, 너 이것도 몰라? 이건 손으로 따는 거야”라며 면박을 줬다. 일명 ‘트위스트 캡’. 외국 여행이라도 해본 사람은 한술 더 떠서 “여기, 라임 한두 조각 갖다 주세요”라고도 했다. 얼마 후 ‘별은 내 가슴에’라는 TV 드라마에서 차인표가 이 맥주를 마시는 장면이 나오자, 여기저기서 이 맥주를 찾았다. 당시 밀러를 비롯한 하이네켄, 코로나 같은 수입 맥주는 ‘마시는 맥주’라기보다는 ‘즐기는 문화’였다.
그리고 15년이 더 흐른 2007년 현재, 수입 맥주 시장은 한층 진화했다. 네덜란드산 하이네켄이나 멕시코산 코로나, 필리핀산 산 미구엘, 벨기에산 레뻬 등 브랜드별 매니아층도 두터워졌다. 수입 맥주를 찾는 이유도 제각각이다.
대학생 송용석(25)씨는 “1년 전 호주에서 어학연수할 때 처음 접한 맥주 맛을 못 잊는다”며 “바로 진한 맛이 특징인 독일산 ‘벡스 다크’였다”고 했다. 필리핀 보라카이나 세부로 신혼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은 또 다른 말을 한다. “당신, 우리 그 해변에서 마셨던 산 미구엘 기억나? 그것 한번 맛보고 싶은데 어디로 갈까?”
그러니까 거품이 일어나고 스파클링이 있다고 해서 모두 맥주라고 부르는 세상은 막을 내린 셈이다. 서울 강남역이나 종로구 관철동 주변엔 ‘맥주 바’라는 개념을 내세운 업체들이 늘어났다. 맥주 바의 테이블에선 “황금색 맥주라고 다 필스너(Pilsner)는 아니라면서?” 같은 대화가 오가고 맥주를 와인 마시듯이 눈으로 빛깔을 확인하고 코로 냄새를 맡은 뒤 마시는 사람도 늘어났다.
맥주 업계 전문가들은 “수입 맥주를 즐기는 층은 기존의 맥주 소비층과 전혀 다르다”며 “실속보다 문화나 분위기를 즐기는 서구 문화에 익숙한 20~30대”라고 한다.
현재 국내 전체 맥주 시장에서 수입 맥주가 차지하는 비율은 1% 정도. 주류잡지 ‘주류저널’의 안용갑 편집장은 “국내의 전체 주류 시장 7조5000억원 중 맥주 시장은 3조원이 넘고, 그 중 수입 맥주 시장은 300억원으로 추산된다”며 “전체 규모는 크지 않지만 ‘나는 밀러’ ‘나는 삿포로’ 식으로 브랜드별로 찾는 사람이 늘고 있다”고 했다.
 
▲ 세계맥주전문점 와바 매장 (photo 유창우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실제로 지난해에도 수입량이 전년 대비 32% 나 증가하는 성장세를 보였다. 관세청 자료에 따르면 맥주 수입량이 2004년 1만8622㎘, 2005년 1만9340㎘, 2006년 2만5507㎘로 성장했다. 지난해 가을부터 수입 맥주 판매를 시작해 25여종을 팔고 있는 삼성테스코홈플러스의 경우, 지난 8월 국산 맥주의 매출이 48% 줄어든 데 반해 수입맥주 매출은 전월 대비 145% 늘었다고 한다.
현재 국내에 들어와 있는 수입 맥주의 가짓수는 200여개. 국내주류공업협회에서 발간한 계간지 ‘주류산업’에 따르면, 맥주 수입 국가별로 볼 때 2006년 현재 상위 5개국인 미국·네덜란드·멕시코·일본·중국이 전체 수입량의 75%를 차지한다. 국가별 대표 맥주는 네덜란드 하이네켄, 미국 밀러, 멕시코 코로나, 일본 삿포로와 아사히, 중국 칭타오라고 한다. 주류 관계자들은 “시장 규모는 크지 않지만 수입 맥주 시장의 성장 가능성이 높은 것만은 확실하다”고 한다. 수입 업체를 통해 들여왔던 맥주 브랜드 중 몇 개는 내년쯤 한국 시장에 직접 상륙할 채비를 갖추고 있다. 국내 시장에 1980년대 중반 법인을 세웠다가 철수했던 밀러를 비롯해 코로나, 삿포로 등이라고 한다. 현재 국내 판매량에서 최고로 알려진 하이네켄만이 유일하게 2003년 설립한 ‘하이네켄 코리아’라는 국내 법인을 두고 있다.
지난 11월 12일 저녁 9시 서울 신문로에 있는 세계맥주전문점 ‘와바(WABAR)’. 알록달록한 빛깔의 맥주병이 전시품처럼 진열돼 있다. 종류만도 90여가지. ‘밀러나 밀러 라이트 3병 주문하면 치즈롤 소시지, 바비큐 윙, 과일(소) 중 택1, 모두 2만8000원’ 같은 안내판이 놓여있다. 이곳에선 ‘원샷’ 하는 폭탄주 같은 건 찾아보기 어렵다. 대신 각기 다른 병이나 맥주 잔을 놓고 얘기를 나누는 손님들이 많다. 한쪽 테이블에선 얼음 조각이 담긴 상자 안에서 맥주를 골라가며 마시는 젊은이들이 있었다.
같은 날, 서울 광교 부근의 맥주 바 ‘USA 75’라는 맥주 바에도 200명 가까운 손님이 찾았다. 보통 한 병에 5000~7000원으로 일반 국산 맥주에 비해 1000~2000원 가량 비싼 편이다. 젊은 여성 세 명이 와선 보드카 크루저 블루베리, 머드쉐이크, 후치를 한 병씩 간단히 마시곤 나갔다.
수입 맥주 시장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초. 1986년 해외여행이 자유화되면서 유학이나 단기연수를 다녀온 젊은층이 늘어난 것도 수입 맥주를 퍼뜨리는 데에 한몫을 했다. 이어 수입 맥주 시장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은 2000년 들어서였다. 필리핀 맥주인 산 미구엘을 수입하는 산미상사의 박진형 이사는 “수입 맥주 시장은 지금도 전년 대비 30% 성장하고 있긴 하지만 2000년대 초엔 매년 100~150%씩 급성장했다”고 했다.
특히 2002년 월드컵 분위기와 맞물려 각종 브랜드들이 소비자를 대상으로 공격적 마케팅 행사를 벌였다. 하이네켄 코리아의 경우 TV나 프리미엄 잡지, 인터넷 매체를 이용했을 뿐 아니라 UEFA 챔피언스 리그와 영화 ‘007 시리즈’ ‘본 얼티메이텀’ 등을 테마로 한 이벤트를 적극 펼쳐왔다. 하지만 활황을 맞았던 수입 맥주 시장은 2003년 들어서 신용카드 한도액 감소 등으로 매출액이 떨어졌다. 그러다가 2005년부터 다시 시장이 되살아나는 분위기다.
그렇다면 수입 맥주를 들여오는 유통 경로를 알아보자. 하이네켄 코리아처럼 국내 법인을 두고 있거나 밀러·코로나·삿포로·아사히 같은 대표적인 브랜드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수입 업체가 영세한 편이다.
1990년대 초 서울 압구정동, 한남동, 방배동 일대에서 팔린 미국 맥주는 대부분 주한미군을 통해 들여온 비품이었다고 한다. 당시에도 유럽 맥주는 별다른 유통망이 없어 정품이 들어왔다고 한다. 이후 소규모 업체들이 한 곳당 서너 개씩의 맥주 브랜드를 직수입하기 시작했다.
맥주 회사 측은 처음부터 판매독점권을 주기보다는 “한번 팔아보라”라고 한 뒤 1~2년 시장을 지켜본 후 손을 잡았다. 한번 시장에 들어온 뒤 바로 실패하면 브랜드 자체의 이미지에 손상이 가기 때문이다.  실제 문 연 지 몇 달 만에 문을 닫은 수입업체들도 많았다고 한다. 한 맥주 수입업체 사장은 “모르는 사람이 여기에 발을 디뎠다가는 거의 다 실패하고 나간다”며 “경제력도 그렇지만 술 짬밥 3년은 돼야 시작해볼 수 있는 일”이라고 했다.